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다 이뤘다!” 꽃잎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집 앞마당에서 네 가족과 두 마리의 골든 리트리버가 포옹을 나눈다. 그림 같은 완벽한 순간은 가장의 해고 소식과 함께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몸담았던 제지업체 태양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유만수(이병헌)가 그동안 지켜온 평화롭고 안온한 삶을 되찾기 위해 재취업의 전쟁에 뛰어들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원작 소설 ‘액스’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웃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던 박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제지업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어느 업계와 시대에도 적용될 만큼 보편적인 현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 경쟁과 가족을 지키려는 한 가장의 절박함을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로 풀어낸다. 그로테스크적이고 사람을 불안하고 불길하게 만드는 박 감독 작품 특유의 매력은 살아 있으나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 대표작을 통해 드러냈던 폭력성과 선정성은 다소 덜어낸 지점이 눈길을 끈다.

● 만수는 왜 “가족을 위한 전쟁”에 나섰나
가족과 평범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던 만수는 어느 날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된다. 아내 이미리(손예진)에게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약속하지만, 1년이 넘게 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처지다. 미리는 테니스 레슨과 댄스 수업을 포기하고, 아들은 넷플릭스 구독을 끊으며 가계 지출을 줄인다.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수는 집마저 팔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집은 그에게 “다 이뤘다”는 느낌을 안겨주던 공간이었다. 결국 만수는 자신의 경력에 맞는 자리를 발견한 뒤 위험한 생각을 품는다. 제지 회사 관리자 채용 공고를 가장한 가짜 구인 광고를 내고, 자신보다 유능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만수는 미리와 아들에게 시시때때로 자신은 지금 “가족을 위해서 전쟁 중이잖아”라는 말을 하며 재취업을 위한 돌이킬 수 없는 몸부림을 정당화한다. 이병헌은 벼랑 끝으로 몰린 가장의 불안과 절박함을 그려낸다. 손예진은 사랑 넘치면서도 현실적인 아내 미리 역을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한다.
극 중 부부로 등장하는 이성민과 염혜란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호흡으로 영화에 색다른 재미를 불어넣는다. 이성민이 연기한 구범모는 만수와 같은 제지 업계 베테랑으로, 장인의 아집과 ‘짠함’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다. 이처럼 만수가 제거해야 할 대상들은 같은 업계 종사자답게 만수의 공감대를 자아내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한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THE AX) 원작으로 하며 박찬욱 감독은 20년간 이 프로젝트를 영화로 만들기를 꿈꿔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자동화된 노동 시장 속 암울하고 냉정한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이와 대비되는 눈부신 영상미와 지형과 건축적 특성을 활용한 치밀한 연출, 특유의 독창적 미장센, 우스꽝스럽지만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로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김창완의 ‘그래 걷자’ 등 절정의 장면에서 흐르는 대중가요 역시 백미다. 이병헌과 이성민, 염혜란의 난투극 속 흐르는 ‘고추잠자리’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라도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이야기는 다소 산만한 양상을 띈다. 한 가장이 절망하며 살인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느껴져야 하는 동기나 연민, 서스펜스보다 유머와 슬랩스틱에 비중을 두면서 날카로움이 다소 희석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쩔 수가 없다”며 살인을 저지르는 만수의 당위가 크게 와 닿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서투르고 어설픈 살인극에서 나오는 어두움과 불협화음은 누군가에게는 씁쓸함과 비극을 안기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의아함으로 다가갈 여지가 있다.
경쟁자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후반의 과정이 단조롭게 느껴지기는 점도 한계다. 미리가 겪는 혼란이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이어지지만, 이마저도 모호한 여운을 안긴다. 이 작품이 박찬욱 감독의 “필생의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균형의 아쉬움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어쩔수가없다’는 박 감독의 보여온 세계관을 한층 폭넓게 확장한 작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화는 녹록지 않은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절망의 끝으로 내몰 때 벌어지는 비극을 탐구하며 미래 사회를 향해 묵직한 경고장을 보낸다. 사회 풍자와 블랙코미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흥미로운 실험이자, 박창욱 감독의 장르적 감각과 미장센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감독 : 박찬욱 / 원작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소설 ‘액스’ / 출연 :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외 / 제작 : 모호필름, CJ ENM 스튜디오스 / 배급 : CJ ENM / 장르 : 스릴러, 블랙코미디, 범죄, 드라마 / 개봉: 9월24일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38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